푸른 빛의 책표지가 강렬해서 눈이 갔다. 두 아이가 바다에서 놀고 있는데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이유는 뭘까? 몇 페이지만 읽어 보자 하고 펼치고는 마지막 장을 닫고서야 책을 내려놓게 되었다. 소설은 자녀를 둔 두 사람이 만나 가족이 되며 각자의 위치에서 가족,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은 기하아버지, 기하, 재하어머니, 재하 이렇게 네 명이 등장한다. 기하 > 재하 > 기하 > 재하 이렇게 두 사람의 회상의 형식으로 전개된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성해나 작가의 소설 《두고 온 여름》 이야기를 시작해본다.
《두고 온 여름》 내용
아무 것도 두고 온 게 없는데 무언가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하의 아버지는 사진관을 운영하신다. 사진관에는 늘 기하의 사진이 걸려있다. 기하의 어머니는 기하가 어릴 때 암으로 돌아가셨다. 기하가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 기하 아버지는 재하 어머니와 재혼을 하셨고 재하 어머니는 기하보다 여덟 살 어린 재하를 데리고 오셨다. 기하는 재하 어머니에게 어머니라는 호칭 대신 '저기' 혹은 '그쪽'이라고 불렀다. 기하의 어머니로 살고자 하는 재하 어머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하에게 재하 어머니는 언젠가 떠날 손님처럼 느껴졌다.
...불편해서요.
가족이 사는 집인데 뭐가? 뭐가 불편한데?
그게 불편해요. 가족도 아닌데 가족인 척하며 사는 게.
그에 반해 열한 살의 재하는 기하 아버지께 아버지라 부르며 서글서글하게 대했다. 기하에게도 형이라고 부르며 곧잘 따르는 재하를 보며 기하는 정말 우리가 진짜 형제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기하는 결국 통학 거리의 대학임에도 기숙사를 들어갔다. 여전히 익숙지 않은 '가족놀이'에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군대를 가면서 그나마 뜸하던 연락도 거의 단절된다. 기하가 군대 간 사이 기하아버지와 재하어머니의 재혼생활은 4년 만에 끝이 난다. 군대를 다녀온 기하는 다시 예전처럼 기하 아버지와 단 둘이 지내던 때로 돌아간다.
폭력적이고 염치 없던 재하의 친아버지가 사진관으로 찾아와 난동을 부리고 칼부림에 기하아버지가 다치면서 더 이상 재하 어머니가 먼저 가족의 끈을 끊어 놓은 게 아닐까 싶다.
기억에 남는 장면
#. 중국 냉면과 땅콩 소스
재하의 아토피가 점점 심해진다. 가려움에 못 견디어 잠에서 깨어 긁어대는 통에 피부는 더욱 진물고 고통이 심해졌다. 없는 형편에 아토피를 치료하는 것은 사치였던 재하네는 기하 아버지의 적극적인 권유로 아토피 치료를 위해 병원을 다니게 된다. 아버지와 재하 어머니가 일하느라 바쁘면 재하와 병원을 함께 가는 일은 기하의 몫이 되기도 했다. 병원을 다녀오는 길이면 늘 중식당에 들러 저녁을 먹는다. 기하는 중국 냉면이 입에 맞지 않지만 재하는 육수가 뿌옇게 되도록 땅콩 소스를 듬뿍 뿌려 먹는다.
"일년 내내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냉면을 앞에 두고 재하는 말했다.
하지만 재하의 회상에서 재하는 중국 냉면이 좀처럼 먹기 힘든 음식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나마 땅콩 소스를 잔뜩 부어 먹으면 넘길 만했다고 말이다. 자신은 싫어하는 음식이지만 형이 좋아하는 거라 어린 재하는 그렇게라도 기하와 형제로 엮이길 노력구나 싶어 마음이 먹먹했다. 그리고 늘 '가족 놀이'에 끼고 싶지 않다 냉담한 태도를 보인 기하도 자기 방식대로 노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던 장면이었다.
재하야, 니는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나?
돌아가고 싶은 순간. 그 물음에 왜 중국 냉면이 생각났던 걸까요. 입안에 감돌던 독특하지만 시원한 식감, 땅콩 소스의 묵직하고도 복잡다단한 맛. 새아버지와 처음 만난 중식당의 생경하면서도 포근한 공기. 자기 몫의 땅콩 소스를 덜어 나의 그릇에 듬뿍 얹어주던 기하 형.
마음이 저려오는 장면이다.
#. 재하어머니의 사랑
사랑받지 못해 그카나, 주는 것도 이래 어렵다.
재하 어머니 역시도 어린 나이에 엄마를 여의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기하의 마음을 잘 이해한다. 어린 기하를 보면서 자신을 보는 듯한 아련함에 더욱 마음이 많이 쓰였다. 그러나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늘 차갑기만 한 기하의 반응을 보며 자신이 부족하다며 죄책감을 느낀다. 재하 어머니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안타까움에 더욱 마음이 먹먹해지는 장면이었다.
읽고 난 후
소설을 읽고 난 후 '그때는 왜 알지 못했던 것일까 '하는 안타까움이 마음 깊이 자리했다. 덤덤하게 읽어 나간 기하의 첫 글에서 새어머니에게 '저기' 혹은 '그쪽'이라 부르며 냉랭한 태도를 일관했던 기하를 보며 조금의 분노가 일었다. 그러나 15년이 지난 후 기하는 여전히 재하와 재하어머니를 떠올린다. 그리고 기하가 재하를 재회하며 보여준 모습을 통해 기하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노력했으리라 짐작이 갔다. 그때 자신이 냉랭했던 태도를 후회하고 미안해하고 멋쩍어하는 기하를 보면서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기하와 재하는 지금 형제로 남아 있을까? 가족이란 무엇일까? 나는 가족이라는 끈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이 소설은 내용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의 시선이 교차되며 서술하는 방식도 새로워 매력적이다. 구구절절하게 자신의 감정을 다 풀어내지 않았지만 보여주는 행동과 회상하는 장면을 보며 네 사람의 감정이 어떠한 충분히 알 수 있다. 특히나 재하와 재하어머니가 끝까지 품에 안았던 사진이 인상깊다. 사진첩 반쪽에 채워진 지난 4년의 시간이 마치 그때 당시의 흐릿한 사진과 빗대어지며 아련하게 다가왔다. 절제되어 있는 문장과 신선한 단어 선택 또한 흥미로운 요소였다. 나름 방대한 단어를 섭렵했다고 자부했으나 소설을 읽으며 몇 가지 단어는 생소해 사전을 찾아보게 될 정도였다. 마치 작가가 선을 넘지 않고 선 밖에서 이야기를 펼치고 있지만 독자들은 어느새 선안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소설의 진행 방식이나 문장 표현, 그리고 단어 선택 또한 소설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요소 같다. 단숨에 집중해서 읽어내려가기 편안한 소설이다.